조선말기에 어부 강사철은 죽세공품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배에 싣고 돌아오다
거센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는데 그러자 아내인 고씨가 며칠동안이나 남편을 찾아
헤매었지만 남편을 찾지 못하자 소복으로 갈아입고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
그러자 남편의 시체가 이 바위 밑에서 떠올랐다고 하는데 1867년 판관 신재우가
이를 신통하게 여겨 조정에 알리고 바위에 절부암이란 글을 새겨 후세에 알리게 하였으며
지금도 마을에서는 이들 부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음력 3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